구타니야키

更新日:2025年03月28日

구타니야키의 역사는 에도시대 전기, 에도시대 후기, 메이지시대 – 쇼와시대 전기, 쇼와시대 후기 – 현대라는 4개의 시기로 크게 구분됩니다.

구타니야키의 역사

1. 구타니야키의 탄생 (17세기 후반)

에도 시대 전기는 구타니야키가 탄생한 시기입니다.

구타니야키는 다이쇼지 번 (藩) 을 다스리던 초대번주 마에다 도시하루 주도하에 1655년에 만들기 시작한 자기입니다. 광산개발 중 영내 구타니 마을에서 도자기의 원료가되는 도석이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마리야키로 유명한 아리타 (사가 번) 의 기술을 도입해 자기의 생산을 시작하였습니다. 도석의 생산지인 구타니 마을에 자기를 굽기 위한 가마를 쌓은 것에의해 그 지명을따라「구타니야키」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구타니야키는 후세「고쿠타니」ㅡ고쿠타니야키ㅡ라고 불려 그 아오데 (青手) 와 아름다운 상・하회 (絵付)스타일이 함께 도자기 장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별시 된 명작으로 소중하게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고쿠타니는 제작 개시로 부터 약 50년 후에 갑자기 생산이 끝나버립니다. 다이쇼지 번의 재정난에 의한 도자기 요장의 자금 부족과 번주의 새대 교체를 계기로 인한 정책 방침의 전환 등 제작 종료의 이유는 몇가지 추정되나 명확한 증거는 찾지 못하고 오늘 까지 수수께기로 남겨진 대로 입니다.

2. 구타니야키의 부활 (19세기)

에도시대 후기는 고쿠타니 제작 중지 이후 끊긴 구타니야키의 제작이 부활하고 또 아카에 (赤絵) 스타일이 탄생한 시기입니다.

고쿠타니 제작 중지로 부터 약 100년 후 다이쇼지 번의「본가의 번」인 가가 번의 성하도시: 가나자와에서 자기 생산이 재계되었습니다. 교토의 자기 장인의 기술 도입에 의해 가가지방 (현재의 이시카와현) 에서 다시 자기가 만들어진 것 입니다. 이 시도는 단기간에 끝나지만 새롭게 전해진 기술과 고쿠타니의 독창적인 다자인을 결합하여 구타니야키의 부활을 목표로 하는 인물이 다이쇼지에 나타납니다.

요시다야 덴에몬. 다이쇼지 성하 마을에 사는 부유한 상인이였던 그는 구타니야키, 그 중에서도 아오데코쿠타니의 부활을 염원하여 1824년 자기 재산을 드려 고쿠타니 가마 옆에 자기 제작을 위한 도자기 요장을 세웠습니다. 그 요장은 그의 상호에 따라 요시다야 가마라고 불리고 고쿠타니에 준하는 예술성과 품질로 당시의 부유층과 지식인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채산을 도외시한 품질 추구는 요시다야 가마의 경영을 압박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통이 편리한 야마시로 지구로 가마를 이축 했으나 7년후인 1831년에는 폐쇠를 하게되었습니다.

마시로의 요시다야 가마는 폐쇠직후 현장 지배인이였던 미야모토야 우에몬에게 인계되어 미야모토야 가마로 재계했습니다. 미야모토야는 가가 번 자기의 영향 으로 아카에를 채용했습니다. 주임 화배공인: 이다야 하치로에몬이 아카에의 치밀한 묘사가 뛰어난 것에 의해 미야모토야 가마의 아카에 작품도 다시 높은 평가를 받아 요시다야 가마와 같은 민영 가마임에도 불구하고 20년 이상 조업을 계속했습니다.

요시다야 가마의 폐쇠로 약해진 아오데 구타니야키의 제작이 였지만 1848년 다이쇼지 번이 새로 세운 마쓰야마 가마로 다시 번성해졌습니다. 메이지 정부에 의해 번의 조직이 해체될 때까지 차 세대에 활약할 장인을 키워 가면서 마쓰야마 가마는 아오데 구타니야키 제작에 힘썼습니다.

3. 명장의 탄생과 산업 융성 (19세기 말 – 20세기 전반)

메이지 시대 – 쇼와 시대 전기는 가마의 장인들이 작가로서 자립하고 또 에도 막부를 계승한 메이지정부의 산업진흥에 의해 구타니야키의 수출 산업이 왕성해진 시기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에도 막부에서 메이지 정부로 정권이 옮겨짐에 의해 가마는 번의 지원을 얻을 수없게 되어 자활에 의한 경영을 할 수밖게 없었습니다.

구 다이쇼지 번의 장인들은 작품의 품질을 더욱 높이는것으로「가마의 일개장인」에서「미술 공예품작가」로 탈바꿈하여 이름을 높히려 노력했습니다. 그들중에서 상・하회 (絵付) 지도자로 차 세대의 작가를 이끌어간 다케우치 긴슈・아사이 이치모 형제나 서 (書) 와 식 (食) 의 장르에서 폭넓게 활약한 기타오지 로산진에게 도예를 가르친 쇼다이 스다 세이카 등의 명장이 배출 되었습니다.

한편 구 가가번 장인들은 수출 산업의 활로를 찾아내 금채을 풍부하게 사용한 아카에 구타니를 중심으로 구미로 향한 작품을 다수 생산하였습니다. 그들의 중심이 된 것은 아카에와 금채에 의한 정밀한 상・하회로 이름이 높은 구타니 쇼자 입니다.

4. 「현대 예술」로서의 구타니야키 (20세기 후반 –)

쇼와시대 후기 – 현대는 전통적인 미술 공예품으로서의 브랜드를 확립한 구타니야키가 현대 예술의 요소를 도입해「공예품」의 틀을 넘은「미술품」으로 제작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또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다종다용한 디자인의 자기가 창안된 것도 현대 구타니야키의 특징입니다.

고쿠타니를 비롯하여 다이쇼지 번이래의 전통을 지켜온 가가시에서는 전통적인 채색 기법을 바탕으로 중근동의 이국적인 디자인과 조각에 의한 장식 등을 도입하여 독창적인 작풍을 세운 기타데 도지로와 후지오 부자가 현대 구타니야키 작가를 리드했습니다.

그리고 가가시에 인접한 고마쓰시에서는 채색료의 그라데이숀에의한 선명한 채색을 완성시킨 산다이 도쿠다 야소키치와 금장식을 유약으로 코딩하는것에 의해 고상한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완성한 요시다 미노리가 일본정부로부터「인간 국보」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구타니야키 상・하회 양식

아오데

녹색 물감을 인상적으로 배색하여 그림을 그려넣은 스타일입니다. 바탕의 여백을 거의 남김없이 자기 전체에 물감을 선명하게 칠한 (여백없이 칠함) 것도 아오데의 특징입니다.

작품의 볼만한 점은 자기 전체에 물감을 여백없이 칠함에 의한 선명한 발색과 농후한 채색으로 창출된 대담한 디자인입니다.

아오데

녹색 물감을 인상적으로 배색하여 그림을 그려넣은 스타일입니다. 바탕의 여백을 거의 남김없이 자기 전체에 물감을 선명하게 칠한 (여백없이 칠함) 것도 아오데의 특징입니다.

작품의 볼만한 점은 자기 전체에 물감을 여백없이 칠함에 의한 선명한 발색과 농후한 채색으로 창출된 대담한 디자인입니다.

이로에 (고사이데)

「구타니고사이」라고 불리움. 녹・황・보라・감청・적색 물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그린 스타일입니다. 5색 물감을 전부 사용하는 점에서「고사이데」라고도 불립니다. 자기의 중앙에 작품의 모티브를 회화적・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도 이로에의 특징입니다.

작품의 볼만한 점은 병풍이나 족자에서 자기로 빠져 나온듯한 그림을 그려넣은 화배공의 숙련된 붓놀림입니다.

아카에 (긴란데)

잘 번지지않는 적색물감의 특성을 살려 자기 전체에「세묘」라고 불리는 가늘한 선을 세밀하게 그려 넣은 스타일입니다. 적색물감 외에 금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작품이 많은 점도 아카에의 특징입니다. 배경을 적색으로 바른 자기에 금장식을 한 스타일은 아카에 중에서도 특히「긴란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작품의 볼만한 점은 장인의 고도한 기술이 요구되는「세묘」의 치밀한 상・하회와 금장식에 의한 무늬와 색상의 화려한 배합입니다.

요장
도자기제작소
상・하회
도자기에 그려넣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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